약산 홍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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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전사영전사 소개
영전사 사적기 (불기 2963년 서기 1936년 述(술)에 의하면 영전사는 신라 문무왕 9년 (기사) 서기 669년에 의상대사께서 창건하신 사찰입니다.

의상스님은 문무왕 16년 (서기 676년)에 태백산에 부석사를 창건하시고, 이곳을 중심으로 화엄대교를 크게 선양하셨습니다. 스님의 교화는 신라사회에 두루 알려져, 국왕이 스님을 더욱 공경했고, 일반 백성들 사이에도 스님의 명성은 자자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님의 문하로 몰려 들었고, 스님에게는 三千徒(삼천도)로 비유되는 많은 제자가 있었으며, 그 중에도 智通(지통), 眞定(진정), 表訓(표훈), 能仁(능인), 良圓(양원) 등 십대제자는 더욱 유명하였다 합니다.

眞定(진정)은 의상스님이 태백산에서 설법으로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소문을 듣고 스님의 문하로 출가했습니다. 출가 이전의 진정은 장가도 들지 못한 채 군대에 소속되어 군대 복역의 여가에 품을 팔아 홀어머니를 봉양하는 빈한한 형편이었지만 효성이 남달랐다고 합니다.

삼국유사에는 진정이 홀어머니와 이별하고 출가하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삼국유사 권5, 眞定師孝善雙美條(진정사효선쌍미조) 진정이 어머니에게 고했다.

“효도를 마친 뒤에는 의상법사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불도를 배우고자 합니다.”

어머니가 말했다.

“불법은 만나기 어렵고 인생은 너무나 빠른데, 효도를 다 마친 후면 역시 늦지 않겠느냐? 어찌 내 생전에 네가 가서 불도를 알았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 같겠느냐? 주저하지 말고 속히 가는 것이 옳겠다.”

진정이 말했다.

“어머님 만년에 오직 제가 곁에 있을 뿐인데, 어찌 차마 어머님을 버리고 출가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가 말했다.

“아, 나를 위해 출가하지 못한다면 나를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비록 생전에 온갖 풍성한 음식으로 봉양하더라도 어찌 효도라고 할 수 있겠느냐? 나는 남의 집 문간에서 빌어서 생활하더라도 또한 타고난 수명대로 살 수 있을 것이니, 꼭 네가 효도를 하려거든 그런 말일랑 하지 마라.”

진정은 오랫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 어머니는 즉시 일어나 쌀자루를 거꾸로 터니 쌀이 일곱 되가 있었는데, 그 날로 밥을 다 짓고 말했다.

“네가 도중에 밥을 지어 먹으면서 가자면 더딜까 염려된다. 내 눈 앞에서 당장 그 하나를 먹고 나머지 여섯을 싸 가지고 빨리 떠나도록 하라.”

진정이 흐느껴 울면서 굳이 사양하며 말했다.

“어머니를 버리고 출가하는 것도 역시 사람의 자식으로 차마 하기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며칠간의 양식까지 모조리 싸가지고 간다면 천지가 저를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세 번 사양하고 세 번 권고했다. 진정은 어머니의 그 뜻을 어기기 어려워 길을 떠나 밤낮으로 갔다. 3일 만에 태백산에 이르러 의상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제자가 되어 법명을 眞定(진정)이라고 했다. 진정은 출가 3년 만에 어머니의 부고에 접했다. 그는 7일 동안 선정에 들어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스승 의상에게 아뢰었다. 이에 의상은 진정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華嚴經(화엄경)을 강의 했는데, 다음의 기록이 이 사실을 전해 준다.
의상은 문도를 거느리고 소백산의 錐洞(추동)에 들어가 풀을 엮에 초막을 짓고 무리 3천명을 모아 90일 동안이나 화엄대전을 강의하였다. 문인 智通(지통)이 강의를 따라 그 요지를 뽑아 두 권의 책을 만들어 이름을 錐洞記(추동기)라 하여 세상에 유통시켰다. 강의를 마치자 그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나는 이미 하늘에 환생했다.”

소백산 錐洞(추동)은 현재의 풍기읍 영전동으로 추정되며, 지금은 송곳골로 불리는 곳이다. 이곳에는 19세기 중반까지도 靈田寺(영전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과수원으로 변했다. (이상은 한국학보 84집 김상현 교수의 논문 -錐洞記(추동기)와 그 異本(이본) 華嚴經(화엄경) 問答(문답)- 의 내용을 발췌한 것임)

현재 영전사 도량에는 2001년 8월 20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324호로 지정된 통일 신라시대 석조 입상 1位(위)가 모셔져 있습니다. 이 부처님은 현재 풍기읍 욱금동 소재 영전마을에서 출토되어진 부처님으로 영전사 사적기에 의하면 부처님의 출토 당시 이야기가 기록되어져 전해오고 있습니다. 癸亥(계해) 11월 28일 (서기 1923년) 밤에 영전마을 거주 黃永奭(황영석)씨의 부인 金金剛華(김금강화) (당시 45세)가 꿈을 꾸니 한 분의 노승이 나타나서 이르되

“小僧(소승)은 수백년을 地中(지중)에 暗埋(암매)되어 광명을 못 본지 久矣(구의)라. 원컨대 나로 하여금 出世(출세)케 할진데 부인의 願(원)을 성취케 하리라.”

하니 괴이하게만 여기고 있었더니, 다시 甲子(갑자) 3월 13일 밤 꿈에 한 젊은 스님이 말하기를

“전일 노승의 부탁을 晏然不聽(안연불청)은 무슨 연고요?”

부인이 말하되

“대사는 어느 절에서 오셨습니까?”

스님이 답하되,

“村後栗樹(촌후율수) 下(하)에 在(재)하니 속히 출세케 하여 주시오.”

하고 因忽不見(인홀불견)이어늘 깨어나서 이상히 생각하고 다음날 아침에 가장되는 황영석씨에게 설명하고 동네 인부를 다수 충동하여 밤나무 밑을 시험삼아 파보니, 과연 一大石佛(일대석불)이 出土(출토)하였기에 운반하여 깨끗한 자리에 奉安(봉안)하니 石佛立像(석불입상)은 身長(신장)이 5尺(척) 7分(분), 胸圍(흉위)가 3尺(척) 4寸(촌) 3分(분) 이라. 이로부터 인근에서 참배자와 공양 올리는 이들이 끊이지 아니하고, 신심있는 신도들이 부처님 전각을 건립코저 하여 희방사 전 주지를 역임하고 불교계에서 덕망이 높은 스님이며, 풍기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던 金海雲堂(김해운당) 老師(노사)와 지방유지의 發記(발기)로 靈田佛像古蹟保存會(영전불상고적보존회)를 조직하고 김해운 선사의 거액과 목재의 희사와 회원들의 활동으로 龍華殿(용화전) 3間(간)과 佛堂(불당) 11間(간) 건축을 시작하여 乙丑(을축) 음력 9월 15일에 준공하고, 奉佛式(봉불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 이상 영전사 사적기에서 -

그 후 비상사태로 인하여 국군전투사령부의 소개령에 의하여 己丑(기축) 음력 9월 15일에 풍기읍 동부동에 移安奉佛(이안봉불)하게 됨에 석불입상의 거신광배가 영전마을 인근 연못에 매몰되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후 영전사는 풍기읍 동부동에서의 포교활동에 의하여 지역주민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어 많은 심신있는 불자들을 배출하게 되었고, 1993년 5월 28일에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 풍기어린이집을 개원하여 지역주민들의 호응아래 많은 영, 유아들의 보금자리이며 사회복지시설로서 2002년 3월 5일 제 10회 입학식을 치루고 영아반 3개반 21명, 유아반 3개반 63명의 원아들을 보육함으로써, 장차 이 세상을 책임질 새싹들에게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신 가르침을 심어 보다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있도록 노력하며, 풍기 지역 여성들의 폭넓은 사회생활과 안정된 가정생활에 일익을 담당하고자 전 종사자들이 열과 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영전사 관음전에 봉안되어진 관세음보살님은 조선 중기 경에 조성되어진 불상으로 추정되며 조각기법이 매우 미려하며, 단아한 모습을 하고 계시는 목조불상으로서 오랜 세월이 경과되면서 초라한 모습으로 퇴색되어지심을 안타까이 여기어 2001년 9월에 주지 비구니 海得(해득)과 신도회장 姜信泰(강신태) 거사, 그리고 신심있는 불자들의 정성과 성금으로 개금 불사를 하여 9월 10일에 점안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영전사 도량 안에는 통일 신라시대 조성되어진 것으로 보이는 석탑 한 기가 있습니다. 이 탑은 삼층 석탑으로써 기단석은 훼손되어지고, 일층 탑신과 일, 이, 삼층의 옥개석이 아직 남아 있으며 앞으로 복원과 문화재 지정작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